남자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 반목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자는 아버지가 죽어야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독립할 수 있다고 한다. 서양과 동양을 가리지 않고 장자일 경우, 그런 아버지에 대한 종속은 더 심해진다.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얌전한 모범생이었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짜르의 암살모의에 연루되어 사형 당한 레닌의 형 알레산드레이 일리치 울리아노프도 그 한 예이다. 남자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애증은 자기 안에 아버지를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남자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사랑은 사실은 연민이고, 그 사랑이 연민이면서 증오인 까닭은, 이해하지만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이 아버지로부터 습성을 닮아간다면 여성은 어머니의 운명을 닮는다. 남성은 아버지 같이 살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를 거부하지만 여성은 어머니 같이 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어머니를 받아들인다.
아들과 아버지는 숫컷들 끼리의 우위를 두고 죽을 때까지 견제하며 살지만 딸과 어머니는 어느쯤엔가는 친구가 되어버린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수직관계는 평생을 두고 계속되지만 딸과 어머니 사이의 수직관계는 ‘어느 날’ 딸이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게 된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여자는 딸과 어머니에서 여성으로 통합된다.
김동화의 ‘황토빛 이야기’(대원씨아이)는 그 ‘어느 날’은 어떻게 오는가? 에 대한 만화이다. 그 ‘어느 날’은, 사내애들과는 다른 몸을 궁금해하던 계집애에서, 봄비를 맞고 더 붉어지는 꽃잎의 색깔에 설레일 줄 알게 되는 소녀로, 그리고 처음 몸에서 붉은 꽃을 피우는 여자로, 마치 세상을 바꾸는 고요한 봄비처럼 경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듯이 나비와 비와 꽃은, 봄이라는 계절과 더불어 이 만화의 전체를 휩싸고 있는 분위기의 주조를 이룬다. 화사한 봄빛 그대로,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꽃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지는 김동화의 그림은 ‘梨花(이화)’라는 소녀의 성장을, 내리는 봄비를 매개로 그리고 있다. 꼼꼼하게 터치된 나무들과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들판의 봄 풍경은 등장인물들의 간략화된 선들과 대조를 이루며 마치 실사에 만화가 얹혀진 것 같은 착각을 주면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서로 녹아있다. 더군다나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린 배경을 해칠세라 만화가는 말풍선 안에도 배경이 비치게 장치해 놓았다.
펜터치와 스크린 톤을 적절히 사용해가며 치밀하게 묘사한 봄들판의 풍경은 이 만화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고있는 성의 구체성을 신화적으로 상승시키며 짙은 서정성을 성취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리고 시종일관 딸의 성장과 그 딸의 ‘어느 날’을 설명해 주던, 어머니 자신의 ‘어느 날’이 흰머리와 함께 오는 장면은 가슴 찡한 울림을 준다. 물러 갈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 함성호/ 시인·건축가
김동화(53)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황토빛 이야기』(전3권·행복한 만화가게)가 7년만에 복간됐다. 주막집 딸인 일곱 살 이화가 철없는 소녀에서 한 여성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노골적인 묘사가 아닌, 꽃과 곤충 등의 비유와 상징으로 ‘성’(性)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자신에게도 기존의 “귀여운 순정 그림체”를 탈피해, 여백의 미를 살린 공간처리와 맛깔스런 사투리, 토속적인 캐릭터로 거듭난 작품이기도 하다. 장수풍뎅이에 빗댄 남녀관계 등 에피소드마다 보여주는 흥미로운 내러티브와 그 속에서 보여지는 등장인물의 미묘한 심리 묘사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남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딸 사이의 교감”을 설득력있게 제시한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주막집을 운영하는 엄마 남원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일곱 살 이화, 그리고 어린 딸의 성장을 지켜보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엄마. ‘여자’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한 두 주인공의 내면이 아름답다.
만화평론가 황민호씨는 “이 작품은 비와 꽃의 이미지로 가득 찬 한 편의 서정시를 연상케 한다”며 “향기가 너무 짙어서 가까이 갈 수 없고 눈부시게 고와서 쉽게 바라볼 수도 없는,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음미해야 하는 그런 만화”라고 했다.
<빨간 자전거>의 작가 김동화의 대표작. 비와 꽃의 이미지로 가득 찬 한 편의 서정시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향기가 너무 짙어서 가까이 갈 수 없고 눈부시게 고와서 쉽게 바라볼 수도 없는, 그래서 조심스레 조금씩 아껴가며 음미해야 하는 그런 만화이다.